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문단 편집) == 희생자들의 안타까운 사연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ke801_photo2.jpg|width=100%]]}}} || || 추락 사고 6일째인 [[1997년]] [[8월 11일]] 아침 괌 현지 유가족들이 퍼시픽 스타 호텔[* 사고 이후에는 코로나로 폐업한 뒤 인도인이 인수했으나 리모델링을 하기에는 너무 낡았고 재건축을 하자니 아직 코로나가 완전히 풀린 것도 아니라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고 생각해서 방치되고 있다. 그래도 2023년 기준으로 괌에 해병대 기지가 지어지면 수요가 생길 거라고 생각했는지 건축 인부들이 이동한다고 한다.] 2층 그랜드 볼 룸에서 전날 밤 설치된 영정을 보며 또 한 번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 사고 당일 보도된 생존자는 29명이다. 원래 현장에서 구조된 인원은 31명이었으나 2명이 이송 도중 사망했기 때문. 이후 추가로 병원에서 중상자 3명이 사망하여 최종 생존자는 26명이다. 휴가철인 8월, 그것도 대표적 휴양지인 괌으로 가는 항공기에서 벌어진 대형 참사였기 때문에 '''가족 단위로 탑승한 경우가 많아서 일가족 전원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았다. 당시만 해도 해외여행이 지금만큼 대중화, 보편화되지 않고 주로 상류층들이 이용했기 때문에 희생자 중에 유명인들이 꽤 많았다. 당시 신문기사에 공개된 희생자, 부상자 명단을 보면 강남, 서초와 같은 부촌 거주자거나 학생들의 경우 8학군 학교에 다니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 이 비행기를 타지 않은 사위를 제외한 장인과 그 일가족 및 직계 비속 8명이 전원 사망하여 장인의 형제들과 사위가 1천 억 원대 유산의 상속권을 두고 3심까지 가는 소송을 벌인 끝에 사위가 승소한 재판이 있기도 했다. 법대생들이 법 공부하다가 ''''동시사망시 대습상속''''의 유명한 판례로서 접하게 되는데([[상속]] 항목의 대습상속 부분 참조) 상속 관련이지만 소유권 이전 등기 말소 건으로 분류되는 사건번호 97가합91172(1998년 4월 3일 서울지방법원에서 판결), 98나21825(1999년 2월 11일 서울고등법원에서 판결), 99다13157(2001년 3월 9일 대법원 판결) 이 세 판결이 바로 그 판례에 해당한다. 여기서 장인이라는 사람은 당시 인천제일상호신용금고(현 에이스저축은행) 회장이었던 이성철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고로 회장 본인과 부인, 아들, 며느리, 손녀, 딸, 외손녀, 외손자까지 일가족 8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이때 한양대 의대 교수였던 사위만 개인 사정으로 혼자 가족여행에 함께 하지 못했는데 사고 후 회장이 남긴 1천 억대의 재산을 두고 이 사위와 회장의 형제 7명이 소송전을 벌였다. 소송의 쟁점이 된 논리가 위의 대습상속인데 간단히 말해 재산을 물려줄 사람(피상속인, 회장)과 재산을 물려받을 사람(상속인, 아들+딸)이 한꺼번에 사망했을 경우 해당 재산이 회장의 형제에게 가야 하는지, 아니면 사위에게 가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였다. 민법에서는 이런 경우 상속을 개시하기 전에 상속인이 사망한다면 상속인의 배우자에게 가야 한다고 정해 놨으며 이게 대습상속이다. 그래서 당시 회장의 형제들은 상속을 개시하기 전에 사망한 것이 아니라 상속이 개시됨과 동시에 사망했다는 논리를 전개해 회장의 재산이 자신들에게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소송은 대법원까지 올라갔는데 대법원은 대습상속은 동시에 사망했을 때에도 적용해야 한다며 사위의 손을 들어주었다. 사위는 그렇게 인천제일상호신용금고와 35곳의 건물과 토지 등을 상속받았고 부동산값이 오르면서 추정 재산은 2천 억대까지 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부동산은 처분하고 인천제일상호신용금고의 주식만 소유하고 있다가 2004년에 재산을 노린 괴한들의 습격을 받은 후 2005년에 인천 지역 유지로 알려진 원광인바이로텍의 김학헌 회장[* 몽베르CC와 에이스저축은행 등을 인수하며 사업을 확장했지만 에이스저축은행이 2011년 저축은행 사태가 터지면서 검찰 수사를 받자 자살했다. 이후 에이스저축은행은 [[하나저축은행]]에 인수되었고 몽베르CC는 [[대유그룹]]으로 넘어갔다.]에게 주식을 매각했다. 이 사위는 처음 상속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는 재산을 자선병원 설립, 장학기금 설립 등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밝혔으나 매각 대금을 실제로 기부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그리고 현재에도 한양대 의대 교수로 있다. * 대한항공 박완순 괌 지점장(1953년생)은 이 사고로 아내와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아들 박수진 군[* 1985~1997. 이 비행기로 사망하기 전까지 다녔던 서울 서초초등학교 측은 당시 [[여름방학]] 중이었으나 사고 이후 박 군의 동창이었던 당시 6학년 학생들을 학교에 비상소집하여 추모식을 가졌다. 영구차가 학교 운동장을 천천히 돌고 떠났다.]을 잃고 당시 대치중학교 2학년이었던 딸 박주희 양만 살아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슬픔을 뒤로 한 채 밤새도록 사고 수습에 전념해야 했으며, 애써 침착함을 보이며 유족(박완순 자신도 유족이었음에도)에게 죄송하다는 인터뷰를 하다 끝내 울음을 터트려 많은 사람들을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984847_19482.html|안타깝게]] [[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html?no=28486|했다.]][* 여담으로 저 사건을 취재한 기자는 [[김재철(언론인)|김재철]]이다. 반면 [[KBS]] 취재 당시엔 소현정 기자가 [[http://mn.kbs.co.kr/mobile/news/view.do?ncd=3776556|맡았다]].] 참고로 박완순 지점장은 그 이후에도 대한항공 홍보팀장, 서비스아카데미 원장 등을 거쳐 지금은 대한항공에서 퇴사하고 인성교육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또 1983년 옛 [[소련]] 전투기 미사일에 격추된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으로 승무원이었던 남편을 잃은 한 [[재미교포]]는 이 사고로 어린 조카와 여동생도 잃어 [[대한항공]]과 원치 않은 악연을 이어가게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80700329122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8-07&officeId=00032&pageNo=22&printNo=16181&publishType=00010|되었다.]] * [[성우]] [[장세준]] - [[정경애]][* 정경애는 이 날이 바로 자신의 '''생일'''이었으며 1997 한국방송대상 여자성우상 후보로 오른 상태였다.] 부부[* 각각 1982년 [[KBS 성우극회|KBS]] 17기, 1977년 [[DBS 성우극회|DBS]] 8기(이후 [[언론통폐합]]으로 KBS 15기로 편입)로 데뷔했다.]가 두 아들인 장성민(장남), 장재민(차남)과 함께 전원 사망했다. 특히 두 사람은 애니메이션과 외화를 가리지 않고 여러 명작에 출연했던 터라 [[성우 덕후|성우 팬]]을 비롯한 시청자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높았던 데다 아내인 [[정경애]]가 [[마법기사 레이어스]]의 주역인 [[호우오우지 후|윈디]] [[http://animate.kr/info/77271|담당으로 내정된 와중에 방송위원회의 방송 불가 판정으로 인해]] 녹음 스케쥴이 없던 상황에서 여행을 떠났다가 일가족이 사망했기에 큰 이슈가 되었다. 심지어 SBS의 원래 계획대로라면 마법기사 레이어스의 방영 시작일이 1997년 8월 6일, '''사고 발생 당일이었다.''' 만약 방송심의를 통과해서 예정대로 방영되었다면 당연히 사고 당일 전후로 녹음 스케쥴이 있었을 테고 이에 따라 정경애가 최소한 사고 당일에 가족 여행을 안 갔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http://animate.kr/talk/103192|당시의 성우 팬 및 애니메이션 시청자들은 방송위원회에 분노의 화살을 돌렸다.]] 물론 방송심의와 항공기 추락 사고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긴 하지만 앞서 언급한 링크에서 보다시피 당시의 방송 심의 자체가 밑도 끝도 없는 트집에 가까웠고 그렇게 방영 일정이 지연된 결과가 [[장세준]] - [[정경애]] 부부의 사망이었던 터라 대중들의 분노는 당연한 것. 이러한 추모 분위기 속에 [[정경애]]는 사후 한국방송대상 여자성우상을 추서받았으며, 이후 방송심의를 통과한 마법기사 레이어스는 윈디 역의 성우를 [[함수정]]으로 교체하여 당초의 예정 날짜로부터 3개월 가까이 지난 10월 27일부터 방영되었다. 또한 이 사연은 2년 뒤인 1999년 [[MBC]]에서 방영한 '한국 100년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설령 장세준 - 정경애 부부가 여행을 가지 않았더라도 그 자리에 다른 승객이 타서 사망했을 거라는 얘기도 있으나 이 항공편은 매진이 아니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385석이 정원이었으며, [[보잉 747-300|747-3B5]]의 크기를 생각해봐도 사고 당시 탑승객 수인 237명은 만석과는 거리가 멀다. 사고기인 HL7468의 자매기인 HL7469의 경우 455석[* 2003년 6월 기준, '2004년 건설교통부 교통통계 및 문헌조사' 자료 참조.]이다. 이 기종은 당시 성수기를 맞아 290여석 정원의 [[A300]]으로는 부족해 전월부터 대체투입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 [[서울대학교병원]] [[레지던트]] 2명도 희생자 목록에 있었는데 이들은 바쁜 와중에 겨우 짬을 내 휴가를 가던 중 이 사고로 사망하였다. 두 사람 모두 여성이었고 이들은 평소에도 친한 친구 사이였다고 하며 치료방사선과(현재는 [[방사선종양학과]]로 이름이 바뀜), [[흉부외과]]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5&oid=001&aid=0004186090#|수련 중이었다고 한다.]] 카더라 통신에 따르면 이 사고 이후로 [[서울대학교병원]] 소속 직원(의사, 레지던트, 간호사 등)이 해외여행을 가려고 하면 주변 직원이 이를 말리는 문화가 존재했다고 한다. 사고로 유능한 레지던트들을 잃은 동료 직원들의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언론계도 유능한 인재를 하나 잃었는데 1973년 [[KBS]] 공채 1기 기자로 입사한 24년차 베테랑인 홍성현 KBS 보도국장[* [[1946년]]생으로, 1994년경에 <뉴스초점> 진행을 맡았다.]이 일가족 5명과 휴가를 위해 비행기를 탔다가 홍 국장의 아내와 차녀를 제외한 일가족 3명(본인 포함)이 변을 당했다.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한국방송기자클럽은 1998년부터 '홍성현 언론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광주광역시]] [[동구(광주)|동구]]를 지역 기반으로 하던 국회의원이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신기하]] 의원(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소속)도 이 사고로 별세했다. 신기하 의원도 위의 성우 장세준, 정경애 부부처럼 부인 김정숙 여사 및 그의 지역구였던 광주 동구의 국민회의 지구당 소속 사람들과 함께 괌 여행을 떠났던 터였다. "만약 신 의원이 이 사고로 사망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의 제 16대 대통령이 [[노무현]]이 아니라 신기하였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최측근이었다.[* 한편 해당 지역구는 [[제16대 대통령 선거|그 해 대선]]과 같이 열린 [[1997년 재보궐선거|재보궐선거]]에서 [[이영일(정치인)|이영일]] 전 의원이 [[무투표 당선]]되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사고 당시 93세였던 그의 어머니 이묘현씨가 다른 식구들이 사고 소식을 알리지 않았음에도 방 안에 있던 TV로 사실을 알게 되어 충격을 받았고 식음을 전폐하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92600209139010&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9-26&officeId=00020&pageNo=39&printNo=23661&publishType=00010|결국 사고 49일 뒤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 여담이지만 신한국당 국회의원들이 사고 현장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해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특히 [[괌]] 현지에서 발생한 사고이기 때문에 현지 장례 풍습에 따라 시신을 [[엠버밍|방부 처리]]하고 온전한 형태로 메이크업까지 마치는 조건 하에서의 사망 인정 및 시신 인도 절차를 고수하는 괌 주정부 측 정책 탓에 시신 인도가 상당히 늦어졌다. 이에 대해 유족들이 항의하여 방부 처리 및 염습하는 자원봉사자들이 추가로 투입되었으나 사고 당시 화재 등으로 인해 시신들의 상태가 온전치 못하기에 시신 처리 과정이 간단치 않아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과중한 업무로 인해 방부 처리 자원봉사를 하던 현지인이 과로사하는 일도 있었다. 자원봉사자 중에는 한국에서도 대형사고 때마다 현장에 출동해 구조 작업을 벌였던 '점박이' 탤런트 [[정동남]](당시 47세)이 있었다. 그는 친한 선배의 아들을 잃었다며 있던 스케줄을 마다하고 사고 발생 다음날 새벽 현지에 도착해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등 자원봉사 활동을 벌여 오다가 NTSB(미국연방교통안전위원회) 측의 발굴 작업 지연에 따른 유가족들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유가족들이 직접 시신을 찾겠다고 나서자 자진해서 11일부터 현장에서 시신 발굴 작업을 도왔다고 한다. 발굴 작업이 지지부진하다는 소식을 들은 삼성그룹 3119 구조대원 2명도 13일 오후 유압 절단기 등을 갖고 나타나 눈길을 끌었는데, 3119 구조대 자문위원이기도 한 정동남의 요청으로 오게 된 한경우(당시 30세)와 최진국(당시 30세)등 2명은 유족들에게 "시신발굴 작업이 늦어져 유족들이 애를 태운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며 "여건만 허락되면 더 많은 동료들을 불러오겠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정동남은 "한경우 등이 가져온 유압 절단기와 전개기(스프레더) 등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도 사용됐던 것으로 시신 발굴에 꼭 필요한 장비"라며 "[[미군]]들이 발굴 작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막더라도 강행할 것"이라고 다짐했다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187476|한다.]] 다행히 정동남은 구조경력을 어필해 미국 정부로부터 발굴 허가를 받아냈다고 한다. 이 사고로 가족을 잃고 [[우울증]]에 시달리던 30대 여성이 새 삶을 살고 싶은 생각에 남의 신상을 도용했다가 구속되는 영화 [[화차(영화)|화차]]와 같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2&sid2=249&oid=032&aid=0002560200|사건도 있었다.]] 유가족 대표 위원장이었던 사람은 대한항공으로부터 돈을 받고 구속되었는데 훗날 [[대한항공 086편 이륙지연 사건]] 이후 [[http://media.daum.net/society/all/newsview?newsid=20150729095008315&RIGHT_COMM=R2|조현아 부사장의 편의를 봐주다가 또 구속되었다.]] 전술한 언론 보도에서 생존자는 29명으로 집계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언론 자료를 뒤져보면 생존자 집계는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어 32명→30명→29명이 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부상자 중에서 화상 등으로 상태가 위중했던 5명은 미국 본토 [[텍사스]] [[샌안토니오]] 브룩 [[미 육군]][[군병원|병원]](Brooke Army Medical Center)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으나 이 중 2명이 9월을 넘기지 못하고 치료를 받던 도중 사망했다. 이렇게 공식적으로 생존자는 26명이 되었다. 그 뒤 같은 병원에서 한 달을 넘게 버티던 여성 생존자 한 명이 10월 10일에 사망하여 실질적인 생존자는 '''25명'''에 불과하게 되었다. 다만 사고 발생 이후 30일이 지나서 사망했기 때문에 공식적인 사망자로 기록되지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